정약용선생묘

정약용선생묘

*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묘 *1972년 5월 4일 경기도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능내리에 정약용을 모신 유택인 여유당(與猶堂)과 함께 공원으로 조성되었다.묘는 부인 풍산홍씨와 합장한 원형의 묘로 남향하고 있고, 묘 앞에는 비좌와 비신 및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을 갖춘 비가 있다. 비신에는 2열로 ‘문도공다산정약용 숙부인풍산홍씨 지묘(文度公茶山丁若鏞 淑夫人豊山洪氏 之墓)’라고 씌어 있다. 비좌는 높이 31.5㎝, 너비 129㎝, 두께 90㎝이며, 비신은 높이 179㎝, 너비 69.5㎝, 두께 34.2㎝이고, 옥개석은 높이 62㎝, 너비 119㎝, 두께 81㎝이다. 묘역 앞에는 1959년에 세운 묘비 2기와 자연석에 여유당이라 쓴 비가 서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하여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의 대학자로서 1762년(영조38) 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하였고, 이벽에세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여 실학과 서학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문과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나 천주교인이라 하여 충청도 해미로 귀양갔다가 10일 만에 용서되어 풀려났다.또한, 거중기와 녹로(도르래)를 만들어 수원서을 쌓는 공정을 단축하는데 크게 고헌하였다. 그 후 경기도 암행어사를 거쳐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 신부의 변복 잠입 사건이 터지자 형 정약전과 함께 이 사건에 관련되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1801년(준조 1)신유박해 때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된 뒤에 황사영백서사건이 일어나 이 해 10월 다시 전라남도 강진으로 옮겨졌다. 이 후 오랜 유배생활에 들어가며 조선사회의 현실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여러 사상과 학문을 검토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1818(준조 18)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마현마을 고향집으로 돌아와 저술생활로 평생을 보냈으며 1836년(현종 2) 75세로 생을 마쳤다.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의 유배기간 동안 경서학에 전념, 실학의 대가가되어 「목민심서 」48권, 「경세유표」49권, 「흠흠신거」30권 등을 쓰면서 정치·경제 등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500여 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였다. 능내리의 다산유적지에 있는 정약용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 7호)는 발치 아래를 감싸고 돌아 흐르는 두물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한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묘 앞에는 비석상과 상석, 그리고 자우에 망주석이 배열되어 있다. 봉분은 단분이며 숙부인 풍산 홍씨와의 합장묘이다. 문화관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를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으며 다산 관련 강연회와 학술발표회가 열리고 있다. 또한, 다산문화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사계절 내내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운영시간

매일 09:00~17:00
※동절기에는 16시까지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 (조안면)

Tip.운영사항은 변동이 있을 수 있으니 정확한 정보는 홈페이지를 확인하시거나 문의바랍니다.


첫 리뷰를 작성해주세요 ~

위치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