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리지석묘와 하마비

읍리지석묘와 하마비

지석묘는 선돌과 함께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전세계적인 분포를 보이며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지석묘는 무덤의 방이 땅 위에 있는 북방식의 바둑판처럼 뚜껑돌 밑으로 조그만 받침돌을 고이는 남방식, 그리고 판석만을 놓고 땅 밑에 무덤 방을 만든 개석식이 있다. 이 유적은 청산면 읍리에 위치하는데 마을동쪽 도로변에 '골기미','독배기' 로 불리는 곳에 하마비와 지석묘가 있다. 이 지석묘는 20여년전 도로공사로 훼손되어 원래 형태는 파악이 어렵고, 현재는 남방식을 띠는 3기만이 완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호는 4개의 지석(고인돌)이 드러나 있고, 2호 역시 4개의 지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3호는 벽석이 드러나 있는 북쪽 판석이 없어졌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 지석묘 부근에서 마제석검 등을 비롯한 석기가 출토되었다고 한다.[지석묘]규모 : 171㎡전형적인 남방계 지석묘군으로 1960년대 중반엔 이곳에서 석검이 출토되었다. 무덤 위에 흙을 올리고 잔디를 입히는 대신 봉분(封墳)을 짓지 아니하고 큰돌덩이로 뚜껑을 덮는 묘제의 일종으로 연대는 북방식보다 좀더 후기로 생각되는 남방식으로 그 반석이 덩어리로 되어 있는 것은 이곳에서 나는 암석의 탓이 아닌가하며 그 당시의 풍속과 생활모습을 말해주고 있는데 주로 해안지방에 떼지어 위치하고 있다.[하마비]읍리하마비(邑里下馬碑)하마비란 조선시대 종묘 및 대궐 문 앞에 세워놓던 비로,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글을 비에 새겨 두었다. 민간신앙에 기초를 둔 것으로, 이 비의 주변에는 10여기의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비는 앞면에 보살상을 새겨두고, 그 아래 ‘하마비’라는 글자는 시멘트로 만든 하단에 새겼다. 불상의 머리 위에 보관(寶冠)이 표현된 것으로 미루어 보살상으로 짐작되며, 고려말·조선초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하마비는 주변에 10여 기(基)의 고인돌과 함께 보존되고 있다. 원래는 이 일대에 있는 조창현씨의 논에 있는 것을 1962년 3월,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하마비는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인데 후면에는 아무런 글자가 없고 전면에 음각마애불(보살상)을 새겼으며 “하마비”라는 글자는 시멘트로 제작된 하단에 새겨넣었다. 마을 유래지(由來誌) 「청산면 읍리」편을 보면 신라시대 이곳에 읍(邑)을 설치하고 치민(治民)하였다.」하나 이를 고증할 길이 없다. 다만 옛날에 현 읍리란 마을 이름이 향교동(鄕校洞)이었다는 내용을 감안하면 청산면에 소규모의 향교가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 “하마비”의 전래는 이 향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전면에 음각으로 조식된 마애불은 머리 위에 보관(寶冠)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보살상으로 추정되는데 그 조성시기는 고려말 또는 조선초기로 추정되고 있다. 이같은 내용으로 보아 원래는 불상이 새겨진 이 입석을 “하마비”로 이용했던 것 같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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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 읍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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