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영정

풍영정

* 강변과 어우려져 경관을 만드는 곳, 풍영정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仙滄山)과 극락강(極樂江)이 마주치는 강변의 대지 위에 있다. 광주와 광산 일대에 있는 100여 개의 정각 중 대표적인 것이다. 풍영정은 명종 15년(1560년) 승문원(承文院) 판교를 끝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김언거(金彦据)가 지은 정자이다. 여기서 그는 7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10여년 동안을 김인후(金麟厚), 이황(李滉), 기대승(奇大升) 등 이름난 문인들과 교우하며 지냈다. 풍영정에 남아 있는 이들의 제영현판(題詠懸板)은 이때의 흔적이다. 또한, 여기에는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편액(扁額)도 걸려 있는데, 이는 명필 한석봉(韓石奉)이 쓴 것이다.김언거(1503∼1584)의 본관은 광산, 자는 계진(季珍), 호는 칠계(漆溪)이다. 김정(金禎)의 셋째 아들로, 1525년(중종 20) 사마시(司馬試), 153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옥당(玉堂)에 뽑혀 교리(校理)·응교(應校)·봉사시정(奉史侍正) 등의 내직(內職)을 거쳐 상주(尙州)·연안(延安) 등의 군수를 지냈다. 승문원 판교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왔다.* 풍영정에 얽힌 전설 *김언거는 덕망이 높아 낙향을 하자 그를 아끼던 사람들이 12채나 되는 정각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풍영정 이외의 11채의 정각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풍영정만 소실을 면한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다른 정자들이 다 타버리고 풍영정이 불길에 휩싸이자 현판 글자 가운데 앞의 풍〉자가 오리로 변하여 극락강 위로 날아올랐다. 기이하게 느낀 왜장이 즉시 불을 끄도록 하자 극락강의 오리가 현판에 날아들어 다시 글씨가 또렷이 되살아났다. 현재 정각에 걸린 현판의 글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풍자와 영정의 글씨체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이 전설이 생겨난 까닭이 아닌가 여겨진다.* 소유자 - 광산 김씨 문중* 규모 - 정면 3 칸, 측면 2 칸, 골기와 팔작지붕* 시대 - 조선시대


대표번호

062-960-8252


주소

광주광역시 광산구 풍영정길 21 (신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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