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송천묘역

양송천묘역

* 정철의 스승, 양송천 묘역 *송천 양응정의 묘역으로 현재 제주 양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묘역에는 1581년(선조 14) 유림들이 세운 묘비와 석물이 있는데 정교하고 고풍이 역연하다. 또 이곳에는 양응정의 아들이며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민공 양산숙의 묘와 양응정의 손자인 한림학사(翰林學士) 양만용(梁曼容)의 묘가 있다. 조선 조 명종~선조 때의 문장가이자 문신인 송천 양응정의 선비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 묘역을 기념물로 지정하였으며, 산 아래(동호동 46)에 제각(祭閣)이 있고 묘 앞에 민병승이 찬(撰)한 신도비(神道碑)가 있으며 묘제일은 음력 10월 10일이다.* 선비정신을 보여주는 송천 양응정 *양응정(1519∼1581)은 字(자)가 공변, 호가 송천으로 홍문관 교리인 학포 양팽손의 아들이다.  1540년(중종35) 생원시에 장원하고 1552년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정자에 벼슬길에 나간 뒤 홍문관부수찬, 예문관봉교를 거쳐 수찬(修撰)에 올랐다. 이어 사간원, 사헌부, 공조, 예조, 병조를 두루 거쳤으나 당시부터 싹 트기 시작한 당쟁의 희생이 되어 박산(광산구 박호동)마을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조정에서는 송천의 재주와 학문을 아까워하여 다시 불러들여 홍문관수찬, 교리, 응교(應敎)와 예문관봉교와 응교, 세자대강원 보덕(世子待講院 輔德), 사간원 사간을 역임했다. 이어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승정원 좌우승지(左右承旨), 성문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사간원 대사간, 사조참의를 거쳤으나 여러 차례 모함에 걸려 광주 진주 목사직과 경주부윤, 의주목사 등 외직으로 옮겨 다니기도 했다.송천은 제자 정철에게 「나는 글로 헛이름을 얻어 자칫하면 비방거리가 되는데 이것은 유자(儒者)의 수치」라면서 「그대들은 행여 문장가가 되려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또 문장가로 이름 높았던 백광성, 홍연(洪蓮) 등의 제자들에게 「궁리의 뿌리 없이 먼저 문자에 능한 자는 있을 수 없다. 나 역시 늦게나마 그것을 깨닫고 후회하고 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글 잘 쓴다고 깊은 사상없이 함부로 붓을 날리는 일이 없도록 당부한 말로서 오늘날에도 절실히 요구되는 훌륭한 가르침이다. 송천은 그 자녀들의 교육도 훌륭하여 「크게는 삼강오상(三綱五常)에서부터 작게는 일사일물(一事一物)까지도 모두 나 자신에게 갖추어진 것으로 수행의 길에는 남녀의 다름이 없다」고 하고 충신, 신독(愼獨), 무자기(無自欺)야말로 학문의 요체이며, 주자의 말대로 「만사불구충효외(萬事不求忠孝外)」라는 말로 자주 깨우쳐 주었다. 이러한 가정교육이 있었기에 훗날 임난때 그 자녀들의 충효열삼강(忠孝烈 三綱)의 본이 세워졌으니 그 자녀들의 애국충절을 위한 고난의 자취는 양씨 삼강문에 정려(旌閭)되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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