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씨삼강문

양씨삼강문

* 충민공 양산숙 일가를 기리는 정려, 양씨삼강문 *양씨삼강문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충민공(忠愍公) 양산숙(梁山璹) 일가의 충·효·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1635년(인조 13)에 건립한 목조로 된 정려이다. 이곳에는 양산숙을 비롯하여 효자, 열녀, 절부 각 두 명씩을 모셨으나, 현재는 나주의 회진 임씨 문중에 출가하여 순절한 양산룡의 딸을 임씨 문중에서 따로 정려를 모시고 있어 6위의 정려만 모셔져 있다. 충민공 외에 충민공의 형제 양산룡과 양산수, 이들 형제의 어머니 죽산 박씨, 누이인 김광운의 처 양씨, 양산숙의 처 광산 이씨 등이다. 충민공의 아버지는 양응정이며 할아버지는 양팽손이다. 이 곳은 이들이 생전에 살았던 박뫼 마을 앞 산기슭으로 삼강문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평범한 건물로 각 기둥 사이에 홍살문을 달아 외부로부터 차단하였다. 외삼문은 평삼문이며 「梁氏三綱門」이란 현판은 1803년 이헌중이 썼다.* 충절과 지조의 상징, 양씨 일가에 대하여 *양산숙은 김천일 장군을 도와 의병을 일으켜 강화도에 진을 친 다음 고경명 장군의 밀서를 가지고 의주행재소로 가서 선조에게 의병의 활동과 적의 동태를 보고 하였다. 이에 선조는 즉석에서 그를 공조좌랑에 임명하고 교지를 내려 군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듬 해 진주성 싸움에서 성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양산룡도 김천일 장군을 도와 의병에 가담하여 진이 강화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호남 지방에서 재물과 곡식을 모아 만 여명의 군량을 조달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가족들을 피난시키기 위하여 나주 삼향포에서 뱃길로 떠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적들이 나타나자 그와 어머니 박씨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이 모두 바닷물에 몸을 던져 지조와 정조를 지켰다. 정려는 여러차례 정문소초를 올린 끝에 인조 13년 생원 홍탁의 상소로 세워지게 되었다.* 절부 - 양응정의 처 죽산박씨, 양산구의 처 지산이씨* 효자 - 양산룡, 양산축 삼향포에서 왜적을 만나 어머니를 구하려다가 순절* 충신 - 양산숙은 임진왜란때 진주성에서 왜병과 싸우다 투강 순절* 열녀 - 양응정의 딸 김광운의 처는 정유재란때 삼향포에서 절사* 소유자 - 제주 양씨 문중* 규모 - 정면 5칸, 측면 1칸, 맛배지붕* 시대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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