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당
한재당(寒齋堂)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무오사화 때 28세의 나이로 화를 입은 이목(李穆) 선생의 위패를 봉인한 사당으로 1849년에 건립된 구사당과 1974년에 건립한 신사당이 있다. 구사당은 맞배지붕 목조와가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일주문과 담장이 둘러 있었으나 신사당 건립으로 인해 현재는 담장만 남아있다. 한편, 신축 사당은 건평 12평의 콘크리트 건물에 위패를 봉안(奉安)하고 숙종 43년(1717)과 경종 2년(1722)에 추증(追贈)한 교지가 함께 보관되어 있다. 선생은 성종 2년(1471)에 출생하여 일찍이 점필제(點畢齊), 김종직(金宗直)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연산군 1년(1495) 문과에 급제하였다. 간사한 노정승 윤필상이 대비를 따라 불교를 받드는 것이 좋다고 성종에게 청했는데 선생이 유생을 거느리고 소를 올려 윤필상(尹弼商)의 간사함을 논박하고 악귀 같은 윤필상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성종이 크게 노(怒)하여 선생에게 묻기를 "네가 나의 대신을 악귀라 하느냐?"하니 선생이 "그의 행동을 사람이 알지 못하니 귀신이라 하였다." 고 대답하였다.왕이 그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으나 다른 대신들의 만류(挽留)로 공주에 귀양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이때부터 바른말 잘하기로 이름이 났으며 연산군 때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으로 종학사회(宗學司澮)를 겸했다가 연안도 평사로 나갔다.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윤필상의 모함을 받아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등과 함께 사형을 받았다. 형장에 나갈 때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스스로 절명의 시를 짓고 죽었다. 공주에 귀양갔던 인연으로 충현서원(忠賢書院)을 세워 제사하였으며 선생은 학문을 하는 여가에 차(茶)를 기호품으로 애용해 우리나라 최초의 차(茶)관련 문장인 「다부(茶賻)」가 선생의 저서에서 발견되어 선생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선생의 「다부」를 높이 평가하여 선생을 다부(茶父) 또는 다선(茶仙)이라 추앙하고 해마다 한재당을 찾아 헌다례(獻茶禮) 행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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