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성모성지
남양 성모 순례지는 병인년(1866년) 대박해 때 많은 순교지들이 피 흘리며 죽어간 무명 순교지이다. 이곳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치명일기(致命日記)와 증언록에 기록이 전해지는 남양의 순교자는 충청도 내포 사람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용인 덧옥돌 사람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 네 사람뿐이다. 남양 순교지는 다른 순교지와는 달리 무명 순교자들의 치명터였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오다가, 1983년부터 성역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 작은 정성들을 모아 가꾸어져 오던 남양 순교지는 1991년 10월 7일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성모께 봉헌되고 한국 천주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화성시에서 화성8경 중의 하나로 지정하여 홍보하고 있을 만큼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이곳은 남양순교성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화강암의 대형묵주알, 그리스도왕상, 성모동굴, 오솔길 소자상, 요셉성인상 등이 있으며, 아늑하고 성스러운 분위기 조성을 위한 성지 조성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 성모님 품 같이 아늑하고 포근한 경관을 지닌 곳으로 시민은 물론 전국의 천주교 신도들의 순례지 겸 휴식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순교지로서의 남양조선조 때 남양은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행정과 사법권을 부여받은 종삼품의 도호부사가 부임했던 곳이다. 남양부사는 경기도 관찰사의 감독 아래 이반행정에 관한 권한 외에도 민사소송과 형사범을 다루는 사법권까지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남양은 물론 그 인근에서 붙잡은 천주교인들을 도호부사가 있던 남양으로 끌어다가 처형했다. 그리고 남양은 지리적으로도 신앙 활동이 자유로웠던 중국과의 연락이 용이한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조 당시 이곳에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찾아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남양과 이웃해서 백학 교우촌이 있던 것도 이곳이 순교지가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기록에 나타난 순교자들- 김 필립보(1818~1868) 충청도 내포사람으로 조모의 가르침에 따라 입교하려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은 후 후일 반대하던 부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영세했다. 전교도 열심히 했고 사제의 공소 방문 때는 사제의 성무를 도왔으며 교우들이 바른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병인년 대박해 때 피신하여 살다가 1868년 남양 감영 포졸에게 아내 박 마리아와 함께 붙잡혀 남양으로 끌려왔다. 이 부부는 온갖 형벌에도 배교치 않았으며 한달 동안의 옥고 끝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나이 50세였다.- 박 마리아(1818~1868) 순교자 김 필립보의 아내로 1868년 남편과 같이 남양 감영 포졸에게 잡혀서 남편과 함께 남양으로 끌려와 한달 동안의 옥고와 가혹한 형벌을 이겨내고 남편 김필립보와 같이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나이 50세였다.- 정 필립보(?~1867) 경기도 용인의 것옥골에서 살았는데, 1866년 11월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붙잡혀 가옥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 해 1867년 1월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김홍서 토마(1830~1868) 수원 갈매리 사람으로 1868년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아내와 함께 감옥에 끌려왔다. 아내는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김홍서 토마는 끝내 배교치 않고 김 필립보 부부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배교한 아내는 김홍서 토마가 순교하자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순교자 김홍서의 나이는 3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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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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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성지로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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