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포 등대
* 국내 유일의 내륙 등대, 영산포등대 *일제강점기 영산강의 가항종점인 영산포 선창에 건립된 등대이다. 1915년 설치된 시설로 수위 측정과 등대의 기능을 겸했다. 이 등대는 우리나라 내륙하천가에 있는 유일한 것으로 1989년까지 수위 관측시설로 사용되었다. 영산포 선창은 1960년대까지 각종 선박이 왕래하면서 많은 수산물들이 유통 되었다. 특히 산 홍어와 추자 멸치젓배가 왕래해 지금도 선창가에는 어물전들이 남아서 그 옛날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바다 아닌 강을 밝히는 유일무이한 영산포등대 *운하가 발달한 외국에서는 강가에서 등대를 발견하는 일이 특이한 것만은 아니다. 바닷가에 면한 해항(海港)이 있다면 강가에 면한 강항(江港)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내륙운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내륙의 항구들이 많다. 운하가 발달하지 못한 우리나라에도 강가 등대가 있는 곳이 있으니 전라남도 나주의 영산포가 그 곳이다. 아마 강가 등대로는 유일무이한 곳이니, 지금은 비록 영산강 뱃길이 끊겨서 제 구실은 하지 못하지만 아직도 의연하게 남아있어 그 옛날 고깃배들이 드나들며 흥청거렸던 시절을 웅변해 주고 있다. 이 영산포등대는 홍어와 깊은 인연을 지니고 있다. 봄바다에 진달래 꽃빛이 드리울 무렵이면 홍어의 북상이 시작된다. 한류성 어족인 홍어가 남쪽 바다에서 자취를 감추면 봄이 완연하다는 증거다. 《자산어보》에도 “동지 후에 비로소 잡히나 입춘 전후라야 살이 두껍고 제 맛이 난다. 2~4월이면 몸이 쇠약해져 맛이 떨어진다.”고 했다.조선시대에도 홍어주산지는 흑산도 근해였다. 요즘 사람들도‘흑산도 홍어’를 입에 달고 산다. 당연히 흑산도를 홍어 문화의 본산지로 안다. 그렇지만 홍어 식도락 문화의 본향은 흑산도가 아니라 영산포다. 흑산도가 원생산지라면 영산포는 최종 가공처라고나 할까. 잡힌 홍어들이 배에 실려 굽이굽이 영산강 뱃길을 따라 일주일여를 올라와 옛 남도의 물류거점이었던 영산포에 닻을 내리면 어느새 홍어는‘푸욱’ 발효되어 예의 ‘썩은 홍어’가 되고 만다.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 먼 뱃길을 따라 영산포까지 올라오는 사이에 자연 발효돼 독특하고 절묘한 맛을 연출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 한 마디. 흑산도 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본디 먹지도 않았다. 흑산도 예리포구에서 만난 뱃사람들은, ‘흑산도에서는 삭힌 홍어 안먹지라. 당신이라면 금새 잡은 싱싱헌 놈 놔두고 그걸 먹겠소?’라고 한다. 싱싱한 것을 먹지 못하는 먼데 사람들이나 먹던 것이 그만 별미가 되고 말았다는 말이다. 실제로 흑산도에 가면 싱싱한 홍어를 생물로 맛볼 수 있다.‘흑산도홍어’의 진실을 확실히 알아야 할것이다.* 영산포와 흑산도의 관계 *영산포는 흑산도와 뗄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고려말 왜구들이 노략질을 할 때마다 도서 지방의 피난민들이 영산강을 거슬러 이곳에 와 머무르곤하다가 아예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흑산도 앞 영산도 사람들이 몰려와 살면서 ‘영산포’라는 지명이 붙었다. 섬과 강변, 바다와 강은 이렇게 하나로 연계되었다. 정작 흑산도 사람들은‘싸하게 썩힌’ 홍어보다 생물(生物)을 좋아한다니 역시 홍어문화의 원조는 영산포임에 틀림없다. 영산강을 이용한 수운의 발달은 영산포라는 새로운 도시의 발달과 지역경제의 발달을 가져왔다. 사실 영산포는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이미 고려시대에 조운제도에 의하여 영산포에 진이 설치되었고, 조선시대에 다시 조창제도가 부활하면서 세곡을 거두어 저장했다가 서울로 운송하는 국영창고인 영산창이 지금의 영산포 택촌마을에 설치되었다. 이 영산창은 전남 17개 고을의 세곡을 모아서 저장하던 곳으로 53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영산창은 수로가 길고 험난해서 해상사고가 많이 났기에 1512년에 영광의 법성창으로 옮겨진다.다시금 영산창이 주목받은 것은 한말부터이다. 조운선이 진을 치고, 남도의 숱한 어선들이 모여들어 도회를 이뤘던 영산포에는 홍어 뿐 아니라 흑산도·낙월도 등지에서 올라온 소금과 온갖 해산물이 철철이 산을 이뤘고, 이 ‘갯것’들은 ‘염질’을 거쳐 광주 등 내륙의 대처로 팔려나갔다. 그 당시의 지도를 보면, 제포(薺浦)라는 포구가 보이고 포촌(浦村)이라는 포구명칭이 적혀 있다. 수심이 3발(三丈)인데 조류가 올라오면 4발(水深三丈潮入則四丈)이라고 한 것을 보면 서해의 조류가 강을 따라 이곳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정확한 증거이다. 상선(商船)이란 설명이 붙은 배들이 여러척 그려져있고, 강가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강상루트의 통행량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초반에 영산포의 새 주인은 일본인들이었다. 조선사람들은 북쪽 포구에 집단촌을 형성하였던 반면에 일본인들은 남쪽에 새로운 포구를 만들었다. 1904년 평남환(平南丸)이라는 10톤급 발동선이 목포와 영산포 간을 운행하면서 종전의 18시간 거리가 5~6시간으로 단축된다. 강을 따라 배들이 모여들고 영산포에는 예전에 없던 5일장도 들어선다. 일본인들이 정착한 것도 이같은 유리한 조건을 십분 감안하였기 때문이다. 오일장을 중심으로 일본인 상가거리가 들어서고 일본식 명칭인 은좌(銀座) 거리도 생겨난다. 영산강 일대의 최대의 쌀 집결지인 영산포의 쌀값 동향을 재빨리 목포의 상인들에게 알리려는 목적에서 우체국도 들어선다.* 영산포 등대의 어제와 오늘 *1906년에는 오늘날의 영산포여자중학교 자리에 일본인 소학교가 들어서고, 전남 내륙에서 는 최초로 영산포 일본인회도 창설된다. 1907년에는 영산포 헌병분대, 1908년에는 광주 농공(農工)은행 영산포지점, 1910년에는 일본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寺) 포교소와 일련종사(日蓮宗寺) 등이 들어선다. 국권침탈 이후, 1914년에 영산목교(榮山木橋)가 건설되고 1915년에 호남선철도가 개통되면서 영산포역이 생겨난다. 그때쯤 등대가 들어서는 것이다. 일제는 너르디 너른 나주평야의 쌀들을 영산포에 모았다가 일본으로 실어 보냈고, 지금도 남아있는 정미소 건물은 이런 수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호남, 특히 나주 일대의 기름진 곡창에서 거두어들인 쌀이 산처럼 쌓였다. 영산강 하구의 목포와 쌍벽을 겨루던 침략의 대상이기도 해 당시 동양척식회사의 문서고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온갖 상품을 파는 상가들이 즐비하고 게다신은 일본인들이 거리를 오갔다. 영산강을 따라서 배에 실려온 홍어들은 포구에 내려지고, 다시 광주로, 나주로, 담양으로 팔려나갔다. 홍어의 전파과정에 서 영산강의 위력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그러다보니 등대까지 생겨났다. 등대는 바다의 상징이다. 누구나 그렇게 아는 바다의 등대가 이곳 영산포에는 바다가 아닌 강에 서 있다. 유일의 강변 등대다. 이미 1915년에 설치됐는데, 그 시절 얼마나 많은 배들이 몰려 들었으면 여기에 등대를 세웠겠는가. 그 관록의 강변에는 지금도 홍어집들이 즐비해 옛날의 영화를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영산강은 이름만 옛 강이로되 사람도, 풍광도 옛 것이 없다. 하구언이 막히면서 물길이 끊겨 ‘끝발 날리던 포구’의 영화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육로와 철로의 발달은 수운의 침체를 유발하였고, 1970년대 국토개발계획에 의한 영산강 하구언 건설은 영산포의 완벽한 몰락을 가져왔다.그러나 불이 꺼진 영산포 등대에도 서광이 비추이고 있다. 조심스럽게 영산강하구언을 철거시키거나 재조정하여 다시금 영산강의 젖줄에서 수운을 살리려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주시에서는 영산포의 선창을 다시 복원하는 ‘근대거리 조성계획’을 수립중이며 당당한 문화유산으로서 뒤늦게나마 재인식하고 있는 중이다. 등대도 영산포의 명물로 거듭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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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나주시 등대길 80 (영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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